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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심포닉시리즈 Review3

  • 작성자*
  • 작성일2005-02-01
  • 조회수5791
톤디히퉁 마지막 콘서트는 낭만주의의 황혼을 겪은 또 한명의 리하르트, 바로 R.슈트라우스의 무대였다. 서양음악사 사상 가장 럭셔리한 관현악법을 구사한 음악가 중 한명이고 악기를 많이 동원하기로는 말러와 비견되나 만년에는 허풍스러운 곡상과 알맹이가 부족한 내용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던 작곡가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날 프로그램은 R.슈트라우스의 음악 중 비교적 진지한 작품에 속하는 「돈 주앙」, ‘4개의 마지막 노래’, 「죽음과 정화」를 다루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영웅의 생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탁월한 연주를 보였던 부천 필이니 만큼 그 기대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첫 곡으로 연주된 「돈 주앙」은 여성을 상징하는 오보에의 연주가 멋들어졌고 영웅적인 힘을 나타내는 혼의 합주가 빼어났지만 전반적으로는 집중력이 저하된 연주라 평할 수 있다. 특히 도입부분이 어수선하고 팀파니의 실수가 있었으며 트롬본 파트의 반응이 느렸다. 사치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부천 필과 임헌정 지휘자에게 한 가지 바라는 욕심이 있다면 연주의 기복을 줄였으면 하는 것이다. 컨디션의 적절한 조절 또한 프로페셔널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의 하나다. 부천 필은 주술적인 놀라운 마법을 발휘할 때의 연주와 그렇지 못할 때의 연주의 격차가 제법 있는 편이고 이 둘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앞으로 남겨진 숙제다. 
원래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있던 낸시 구스타프슨이 건강문제로 주디스 하워스로 교체되었는데, 그녀 역시 컨디션 문제로 당일 노래를 소화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고 한다. 공연 한 시간 전인 7시까지도 확정 되지 않아 많은 공연관계자를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다행히 극적으로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4개의 마지막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약간 무겁게 가라앉은 듯한 음색이었지만 자기과시를 벗어 던진 만년의 슈트라우스 예술의 절정을 전해주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아름다운 바이올린 독주와 어우러진 3번째 곡 ‘잠자리에 들 때’는 헤르만 헤세의 시처럼 청중의 영혼에게도 ‘자유로운 날개’를 달아 주는 듯 했다. 마지막 곡으로 연주된 「죽음과 정화」는 R.슈트라우스의 젊은 혈기와 죽음의 공포가 어우러진 장대한 대서사시에 가까웠다. 해석상 죽음이 처음 몰려오는 부분을 덜 사납게 연출하여 점층적인 고조를 희망하는 듯 했고 압도적인 튜티와 함께 그 유명한 정화의 테마가 울려 퍼지는 부분은 청중을 압도했다. 비록 이날 부천 필의 집중력은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처럼 긴장감으로 머리칼을 세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톤디히퉁의 대미를 장식하는 데 부족하지 않은 연주였다. 
 
R.슈트라우스의 과포화된 오케스트라 음향을 들으면서 문득 이런 식의 후기낭만적 팽창은 분명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런 형태의 음악이 단명할 것은 예견된 일이었고 그와 함께 음악과 시의 만남도 종말을 고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의전당 심포닉 시리즈 부천 필의 톤디히퉁은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고 할 수 있는 두 예술의 진한 포옹의 순간을 보다 거시적으로 조망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프로그램이었다. 문학과 음악의 결합은 비록 음악 자체의 상상력을 제한시키는 단점이 있지만 두 예술의 조합이 던져주는 독특한 향기로 공연 내내 보다 강렬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톤디히퉁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음악용어가 아니라 2004년 하반기를 물들인, 뛰어난 기획력이 발휘된 멋진 공연으로 기억될 것이다. 
 
글 : 김문경(『구스타프 말러』 저자 / 음악 칼럼니스트)